- 장비·솔루션·이웃기업·대기업, 네 갈래 병목
- STEPI, 공급망 협력형 5대 정책과제 제시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이 지난 11일 펴낸 『STEPI Insight』 제364호에서 제조 중소기업의 인공지능 전환(AX)을 가로막는 새로운 진단을 내놨다. 그동안 정부 정책은 개별 기업에 장비나 솔루션을 보급하는 방식에 집중해 왔지만, 정작 데이터는 한 기업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게 핵심이다. 보고서는 신기윤·오윤환·윤정섭·진설아 연구진이 참여해 작성했다.
제조데이터란 제품을 기획하고 만들고 관리하는 전 과정에서 쌓이는 기록을 말한다. 불량을 미리 예측하거나 설비 고장을 앞서 파악하는 데 꼭 필요한 재료다. 문제는 이 데이터가 한곳에 모여 있지 않다는 점이다. 설비에서 나오는 데이터는 장비를 만든 회사 시스템에 묶여 있고, 생산관리 데이터는 솔루션 회사가 깔아준 프로그램 안에 있으며, 거래 과정에서 생기는 데이터는 대기업 쪽에 쌓인다. 중소기업 혼자서는 이 흩어진 조각을 모아 원인을 분석하기 어렵다.
공장 담장 밖으로 흩어진 데이터
실제로 정부의 스마트공장 보급사업 덕에 경영·생산관리 프로그램을 들여놓은 중소기업은 많아졌지만, 정작 데이터를 활용한 AI 분석까지 이어진 곳은 드물다. 기업 열에 여섯 곳 가까이는 “데이터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고 품질도 낮다”는 어려움을 토로한다. 장비만 갖췄다고 저절로 AI 전환이 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보고서는 중소기업을 중심에 놓고 데이터가 오가는 관계를 네 가지로 나눴다. 장비회사와의 관계에서는 장비마다 데이터 형식이 달라 연결이 어렵다는 게 문제다. 솔루션회사와의 관계에서는 프로그램을 한 번 깔아준 뒤 꾸준히 손봐주는 사후관리가 부족하다는 점이 걸림돌로 꼽혔다.
이웃한 중소기업끼리는 서로 비슷한 불량 문제를 겪으면서도, 데이터를 나눴다가 영업비밀이 새 나갈까 봐 선뜻 협력하지 못한다. 중견·대기업과의 관계에서는 중소기업이 일방적으로 데이터를 제공만 하고, 분석 결과는 돌려받지 못하는 구조가 되풀이된다는 지적이다.
독일의 카테나엑스, 표준 있어도 효과 지연
이런 진단은 국내 사례뿐 아니라 해외 사례에서도 비슷하게 확인된다. 예컨대 독일의 자동차 산업 데이터 공유 체계인 카테나엑스(Catena-X)는 표준을 마련해 놓고도, 참여 기업마다 데이터 품질과 내부 시스템 수준이 달라 실제 효과를 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유사한 문제는 국내 다른 산업에서도 반복돼 왔다. 예컨대 조선업계의 협력사 데이터 공유 논의에서도 원청과 하청 간 정보 비대칭 문제가 꾸준히 지적된 바 있어, 이번 보고서의 진단이 제조업 전반에 던지는 시사점은 작지 않아 보인다.
이에 보고서는 다섯 가지 정책과제를 제안했다. 장비 데이터 표준을 정비하고, 솔루션 도입 이후에도 꾸준히 손봐주는 체계를 만들며, 이웃 기업끼리는 원본 데이터를 직접 공개하지 않고도 함께 학습할 수 있는 방식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기업과의 관계에서는 분석 결과를 협력사에 되돌려주는 플랫폼과, 데이터 제공이 불이익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공정거래 지침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단기적으로 기존 지원사업의 평가 기준에 데이터 품질 지표를 시범 적용하고, 장기적으로는 데이터 소유권과 성과 배분을 정하는 법과 제도를 갖춰야 한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제조 중소기업이 국내 제조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이들이 데이터를 손에 쥔 채로도 정작 활용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AX 정책의 실효성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게 연구진의 결론이다.
By 김재호 기자(한국영업비밀보호협회 이사) kimyital@kyosu.net
출처 : 교수신문(https://www.kyosu.net)
